완성된 종이책 펼침면과 전자책 표지
왼쪽이 종이책 펼침면, 오른쪽이 전자책 표지입니다. 원고는 하나인데 결과물은 둘이에요.

아내가 브런치에 연재하던 도쿄 여행기를 책으로 냈습니다. 종이책과 전자책, 둘 다요.

작년에 낸 『시드니, 한 달의 온기』에 이은 두 번째입니다. 첫 책 낼 때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번엔 좀 수월하겠거니 했지요. 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글은 아내가 쓰고, 그 글을 책 모양으로 앉히는 건 제가 맡았습니다. 이 시리즈는 그 과정 기록입니다. 자랑보다는 삽질 기록에 가깝습니다.


📦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종이책 105쪽, 전자책 31MB. 20화에 원고 28,206자, 사진 47장이 들어갔습니다.

종이책은 교보문고 퍼플로, 전자책은 작가와로 냈습니다. 왜 두 군데로 나눠 냈는지는 마지막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만드는 데 걸린 시간보다 다시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뽑아보고, 어색한 데를 찾고, 고치고, 다시 뽑고. 그 반복이 이 시리즈의 내용입니다.


🤖 먼저 밝힐 게 하나 있습니다

이 작업에 AI를 썼습니다. 요즘 예민한 주제라 어디까지 썼는지 정확히 적어두는 게 낫겠더군요.

📌 본문 28,206자는 아내가 전부 썼습니다. AI는 한 글자도 쓰지 않았습니다.
AI가 한 일은 그 원고를 책 모양으로 앉히는 도구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조판 스크립트, 판형 실측, 사진 배치 같은 것들입니다. 사진 47장도 전부 우리 가족이 찍은 겁니다.

이 구분이 중요합니다. "AI로 책 만들었다"고 뭉뚱그리면 본문까지 기계가 쓴 것처럼 들리니까요. 이 시리즈에서 다루는 건 글이 아니라 조판입니다. 그러니 글솜씨 얘기는 기대하지 마세요...


😩 왜 굳이 직접 만드나

책으로 내자고 한 건 접니다. 아내가 아니라요.

그래놓고 작년에 어떻게 만들었냐면요. 표지, 전자책, 종이책을 전부 따로따로 만들었습니다. 각각 다른 유료 에디터를 써서요. 표지는 표지 편집기로, 전자책은 전자책 편집기로, 종이책은 또 그것대로.

문제는 세 개를 다 배워야 했다는 겁니다. 프로그램마다 용어가 다르고 단축키가 다르고 되는 게 다릅니다. 하나 겨우 익혀서 만들어놓으면 다음 프로그램에서 또 처음부터. 돈은 돈대로 나가고요.

그렇게 첫 책을 냈습니다. 정말 질릴 정도로 어려웠어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답답한 건 그렇게 고생해놓고도 남는 게 없다는 점입니다. 오타 하나 고치려면 그 프로그램을 다시 열어서, 그 자리를 다시 찾아서, 다시 내보내야 합니다. 세 번을요. 다음 책을 낼 때도 처음부터 똑같이 반복해야 하고요.

게다가 이번엔 시리즈입니다. 두 권을 나란히 꽂았을 때 같은 책처럼 보여야 하는데, 편집기로 눈대중 맞추는 걸로는 어림도 없지요.

그래서 이번엔 같은 원고에서 두 가지 책을 자동으로 뽑아내는 도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한 번 만들어두면 원고가 바뀔 때마다 그냥 다시 돌리면 됩니다. 오타를 고쳐도 한 군데만 고치면 되고요. 게을러지려고 부지런을 떤 셈입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 판단은 옳았습니다. 이 시리즈를 읽다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이 책을 수십 번 다시 뽑았거든요. 손으로 만들었으면 진작 포기했을 겁니다.


🔋 쉬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요

솔직히 시작할 때는 아 이번에도 고생길이 훤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작년 기억이 생생했으니까요.

그런데 AI 도움을 받아 시작하니 웬걸, 술술 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이거 생각보다 할 만한데? 싶었습니다. 그 기분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만.

처음에는 안티그라비티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생각보다 멍청하더군요. 시킨 걸 엉뚱하게 알아듣고, 고쳐놓은 걸 다시 망가뜨리고. 그때마다 붙잡고 설명하는 시간이 쌓였습니다.

결국 아내가 유료로 쓰고 있던 클로드로 넘어왔는데, 여기까지 오는 데 2주가 넘게 걸렸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어요.

그리고 매일매일이 토큰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토큰 아낄 방법을 몰랐거든요.

특히 초반에 책의 줄맞춤을 하자고 했을 때가 심했습니다. 문단을 어디서 끊을지 정하려면 책을 하나하나 다 읽어야 하잖아요. 그러니 토큰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습니다.

작업은 보통 밤에 합니다. 그러다 토큰이 다 차면 풀리는 게 새벽이에요. 한밤중에 손이 묶여서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심할 때는 1주일치를 다 써버려서 5일 넘게 아무것도 못 한 적도 있습니다. 책은 그대로 멈춰 있고요...

따져보면 이렇습니다. 아내가 1주에 한 편씩 연재했으니 20편에 20주. 그걸 책으로 만드는 데 10주가 더 걸렸습니다. 글이 이미 다 있는데도요. AI 도움을 받고도 그렇습니다.

AI랑 일한다는 게 어떤 느낌이냐면요. 일은 잘하는데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게다가 하루 사용량이 정해져 있는 부하직원과 일하는 것 같습니다. 시켜놓으면 곧잘 해옵니다. 그런데 가끔 엉뚱한 걸 해오고, 한창 손발이 맞아갈 때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하고 퇴근해버립니다.

💡 혹시 비슷한 걸 시작하신다면
도구부터 제대로 고르세요. 2주 버리고 배운 겁니다. 그리고 원고 전체를 읽혀야 하는 작업은 한 번에 몰아서 시키는 게 낫습니다. 물어볼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읽히면 그만큼 토큰이 나가거든요. 이건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 원고 하나에서 두 갈래로

구조는 단순합니다. 원고 텍스트 파일 하나. 거기서 길이 둘로 갈라집니다.

원고 하나에서 종이책과 전자책이 갈라지는 구조도
원고 파일 하나에서 길이 둘로 갈라집니다. 사진도 각자 다른 규격으로 처리됩니다.

종이책은 파이썬으로 워드 파일을 만들고 그걸 PDF로 굽습니다. 굳이 워드를 거치는 이유가 있어요. 맞쪽 여백, 챕터별 머리글, 쪽 번호 같은 인쇄용 기능이 워드 규격에 이미 다 들어 있거든요. 없는 걸 만드느니 있는 걸 쓰는 게 낫습니다.

전자책은 같은 원고에서 EPUB을 만듭니다. EPUB은 사실상 웹페이지를 묶어놓은 물건이에요. 그래서 판형 개념이 아예 없습니다.

이 차이가 생각보다 큽니다. 종이책은 쪽이 고정이라 "87쪽 사진을 89쪽 것과 바꿔달라" 같은 말이 성립합니다. 전자책은 독자가 글자 크기를 키우면 쪽이 다시 흘러요. 87쪽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원고인데 다루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구분📕 종이책📱 전자책
만드는 방법워드 파일 거쳐 PDF웹페이지 묶어 EPUB
쪽 개념고정. 87쪽은 늘 87쪽없음. 글자 키우면 다시 흐름
사진 기준300dpi 이상 (크게)가로 1,600px (작게)
파일 크기8MB31MB
낸 곳교보문고 퍼플작가와

여기서 지킨 원칙 하나. 원고 파일을 두 벌 두지 않는다. 오타 하나 고치자고 두 파일을 손대기 시작하면 반드시 어긋납니다. 반드시요. 원고는 하나, 결과물은 둘입니다.


🖼️ 사진에서 길이 크게 벌어집니다

두 갈래가 제일 크게 벌어지는 데가 사진이었습니다. 이 책에 사진이 47장 들어가거든요.

인쇄는 크게, 전자책은 작게.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인쇄는 300dpi가 기준입니다. 68mm 폭으로 앉힐 사진이면 가로 803픽셀은 있어야 해요. 그보다 낮으면 종이에서 뭉갭니다. 화면에서 멀쩡해 보이던 사진이 인쇄하면 흐릿해지는 게 이것 때문이지요.

전자책은 반대입니다. 원본 그대로 넣었더니 파일이 124MB가 나오더군요. 이 정도면 받는 것도 일이고 넘김도 굼뜹니다. 가로 1,600픽셀로 줄이니 31MB가 됐습니다.

형식도 말썽이었습니다. 아이폰이 만든 webp 사진이 섞여 있었는데, 전자책 리더 상당수가 webp를 못 읽어요. 그걸 모르고 넘어갔다가 9화, 10화, 12화 사진이 안 보이는 채로 아내에게 검수를 부탁했습니다. 잘 만들었다고 자신만만하게요... jpg로 바꿔서 해결했습니다.


🗂️ 앞으로 다룰 것들

여섯 편으로 나눠 적을 생각입니다.

2편 : 전작을 자로 재서 똑같이 만들기. 첫 책 설정값이 하나도 안 남아 있어서 인쇄용 PDF를 파이썬으로 실측했습니다. 여백 재다가 세 번 틀렸어요.
3편 : 사진 47장을 어디에 넣을 것인가. 처음 뽑았더니 빈 페이지가 31개 생겼습니다.
4편 : 책이 통째로 사라진 날. 원고 파일이 95KB에서 1.9KB가 됐습니다. 범인은 제가 짠 코드였고요.
5편 : 접히는 표지 만들기. 날개까지 한 장에 펼쳐 그려야 합니다.
6편 : 작가와와 교보 퍼플, 두 곳에 등록하기. 같은 책인데 준비물이 다릅니다.

다음 편은 전작을 자로 잰 이야기입니다. 첫 책을 만들며 썼던 재료 중에 손에 남은 건 인쇄용 PDF 한 개뿐이더군요. 나머지는 유료 편집기 안에 갇혀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걸 뜯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