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북트레일러라는 걸 알려줬습니다. 저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책을 한 권 내고 나면 그다음이 늘 막막합니다. 원고를 쓰는 동안은 할 일이 분명한데, 책이 나온 뒤에는 무엇을 해야 이 책이 누군가에게 가 닿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들은 이야기였습니다.


북트레일러가 뭔가요

영화 예고편을 필름 트레일러라고 부르지요. 거기서 따온 말입니다. book + trailer, 그러니까 책의 예고편입니다. 보통 30초에서 길어야 3분 안쪽의 짧은 영상으로 만듭니다.

중요한 건 줄거리를 설명하는 영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화 예고편이 결말을 알려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책의 분위기와 온도, 그리고 "이 안에 무슨 이야기가 있길래" 하는 궁금증만 남기고 끝내는 것이 북트레일러입니다.


홍보물이라기보다, 책을 읽는 한 가지 방법

친구의 설명을 듣고 제가 이해한 건 조금 달랐습니다. 북트레일러는 광고라기보다 책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하나의 장르에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한 권을 20초로 줄이려면 이 책이 대체 무슨 책인지 내가 먼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장면을 남기고 어떤 장면을 버릴지 정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 책의 한가운데가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요약하는 일이 아니라 버릴 것을 고르는 일이더군요.

제 책으로 그걸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표지에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여보, 애들이 도쿄면 간다하네》 표지에는 사진이 세 장 들어가 있습니다. 가미나리몬의 붉은 등, 도쿄 지하철 72시간 티켓, 그리고 밤의 아사쿠사 거리. 전부 그 나흘 동안 저희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다가 생각했습니다. 여기 이미 그 나흘이 다 들어 있는데, 이 사진 속으로 카메라가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시작 그림부터 만들었습니다. 표지 파일을 그대로 쓰지 않고, 제미나이(Gemini)나무 탁자 위에 종이책이 놓여 있는 사진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옆에 커피잔과 안경, 마른 잎이 있는 그림입니다. 화면 속에서 이게 '읽던 책'으로 보였으면 했거든요.

나무 탁자 위에 놓인 여보, 애들이 도쿄면 간다하네 종이책과 커피잔
영상의 첫 화면. 실제 표지를 놓고 만든 그림입니다. 여기서 카메라가 출발합니다.

도구를 둘로 나눠 썼습니다. 그림은 제미나이, 움직임은 힉스필드(Higgsfield)입니다. 제미나이로 만든 그 사진을 힉스필드에 넣고, "책 쪽으로 가까이 줌 인, 표지 속 사물들이 움직이고..." 하는 식으로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이면 좋겠는지를 적어주면 영상이 나옵니다.

그렇게 만든 것이 20초짜리 영상입니다. 탁자 위의 책으로 카메라가 다가가다가 표지 속 붉은 등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가미나리몬 앞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저녁 거리가 펼쳐집니다. 이어서 골목길, 마지막에 지하철역과 지나가는 전철. 덮여 있던 책 한 권이 여행지로 열리는 셈입니다.

영상 속 가미나리몬 장면 - 붉은 등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표지 속 등 안으로 들어가면 이 장면이 나옵니다. 사진 한 장이 저녁의 아사쿠사로 열립니다.

세 번 만들었고, 끝내 못 얻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 번에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힉스필드에서 처음 뽑은 영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두 번쯤 더 돌렸습니다. 다 합쳐 세 번입니다.

제가 원했던 그림은 분명했습니다. 표지 위에 얹힌 사진은 네모난 액자처럼 테두리가 또렷합니다.프레임이 변형되지 않은 채로 카메라만 그 안으로 쑥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야 "여기는 책이고, 지금 우리가 그 책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한눈에 보이니까요.

그런데 만들어진 영상에서는 사진 프레임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그림이 화면 전체로 번지듯 들어갑니다. 사진이 표지에서 떠올라 제멋대로 커지고, 그 아래 있던 제목 글씨를 덮어버립니다.

표지에서 사진이 떠올라 경계가 흐려지고 티켓의 글자가 깨진 장면
아쉬웠던 컷입니다. 티켓이 표지에서 떠올라 제목을 가렸고, 72시간 티켓의 '72'가 '12'로, 글자들이 뜻 모를 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글자도 버텨주지 않았습니다. 티켓의 72가 12로 바뀌었고, 그 위의 글씨들은 읽을 수 없는 모양이 되었습니다. AI가 만드는 화면에서 작은 글자는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는 걸 이때 알았습니다.

반대 방향으로도 해봤습니다. 아예 책이라는 물건은 빼고 표지 사진 세 장만 위아래로 쌓아 각각 움직이게 한 버전입니다. 이건 사진 테두리가 반듯하게 유지됩니다. 대신 책이 사라졌습니다. 예쁜 도쿄 영상은 됐는데, 어느 책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는 영상이 됐어요.

표지 사진 세 장을 세로로 쌓아 각각 움직이게 한 다른 시도
다른 시도. 사진 테두리는 지켜졌지만, 이번엔 책이 화면에서 사라졌습니다.

결국 둘 다 가진 컷은 못 얻었습니다. 책을 살리면 프레임이 녹고, 프레임을 살리면 책이 없어졌습니다. AI에게 "이건 움직이게 하고 저건 그대로 둬라"는 주문이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입니다. 무엇을 움직일지는 잘 알아듣는데, 무엇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지는 잘 못 알아듣습니다.


소리는 통째로 바꿨습니다

영상에 효과음이 함께 붙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무음으로 처리했습니다. 대신 인스타그램에서 조회수가 잘 나오는 음악을 골라 얹고 릴스로 올렸습니다.

영상은 AI가 만들었지만, 그 영상이 놓일 자리는 인스타그램입니다. 그 동네에서 잘 들리는 소리가 따로 있더라고요.


결과는, 평소보다 잘 안 나갔습니다

솔직하게 적겠습니다. 평소 올리던 게시물보다 반응이 덜했습니다. 공들여 만든 영상이라 내심 기대했는데 그랬습니다.

그래도 이 시도가 헛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20초를 만들려고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고, 어떤 장면을 남길지 고르는 동안 제 책의 한가운데가 어디인지를 제가 다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말한 "책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장르"라는 말이 그제야 이해됐습니다. 조회수와는 별개의 소득이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것들이 남았습니다. 무엇이 잘 안 되는지(프레임 유지, 작은 글자), 소리는 어디서 가져와야 하는지, 표지 한 장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다음 영상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다음에 해보려는 것

이번 영상은 표지로 만든 트레일러였습니다. 다음에는 책 내용으로 몇 개 더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스무 편 중에는 영상으로 옮기고 싶은 장면이 여럿 있습니다. 한 편에 하나씩, 짧게 여러 개를 만들어 보려 합니다. 그러면 한 권을 20초로 줄이느라 버려야 했던 장면들에도 각자의 20초가 생기니까요. 그게 오히려 이 책을 더 정확하게 보여주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보, 애들이 도쿄면 간다하네》는 전자책과 종이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표지 속 붉은 등이 실제로 어떤 밤이었는지는, 책 안에 적어두었습니다.